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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영상앨범 산"에 출연한 후-

조회 수 11017 추천 수 0 2014.02.21 16:48:53


“거제도의 추억”

-‘영상앨범 산’에 출연해서-

2월 5일 수요일

2014년 1월 19일, 매주 일요일 아침 7시 40분부터 빠지지 않고 보는 KBS2의 ‘영상 앨범 산’에서 3월 KBS 창사기념일을 맞아 '영상 앨범 산'에

출연할 65세 이상의 시청자를 신청 받는다는 자막을 보고 즉시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니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영상앨범 산> 에서는 3월 3일 KBS 창사 기념일을 맞아

'즐거운 산행, 건강한 인생' 을 주제로

만 65세 이상 시청자와 함께 하는 시간을 마련합니다.

산행을 통해 건강과 행복을 지키고 계신 분,

더 행복한 노후를 위해 이제 막 등산을 시작하신 분,

평소 <영상앨범 산>을 시청하며 참여를 희망했던 분 가운데

만 65세 이상 시청자 여러분의 참여 신청을 기다립니다.

신청 요건

- 만 65세 이상 남녀

- 1인 개별 신청 (산행을 통한 친목 도모를 위해 일행이 아닌 개인 신청)

촬영 일정

- 촬영지 : 거제도 풍경구 트레킹 & 노자산(565m), 가라산(585m), 망산(375m) 산행

- 촬영일 : 2014년 2월 16일(일) , 17일(월), 18일(화) (* 날씨 및 현지 사정에 따라 변동)

신청 방법

아래 문항의 답변을 작성, 얼굴과 전신이 잘 보이는 본인의 사진과 함께 본 게시판에 올려주시거나 kbs1tvsan@empas.com 으로 메일을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신청을 마감한 2월 5일 오늘까지 게시판으로 신청한 사람이 210명, 거기에 메일로 신청한 사람까지 합하면 훨씬 더 많을 거여서 ‘희망을 버리자’

했는데 신윤호 작가로부터 내가 ‘선정’되었다는 연락이 왔다. 참 기쁘다. 2월 16일 아침 5시 30분까지 여의도 KBS에 나오라고 한다. 헤드랜턴 수통

스틱을 준비하고.


게시판에 들어가 보니 나처럼 본인이 직접 신청한 사람도 있고 아버지나 어머니를 대신 신청한 자식들도 있고 처가의 어른을 신청한 사위도

있고 시어른을 신청한 며느리도 있다. 또 남편을 참가하게 해 달라는 어느 부인도 있고 아내를 참가하게 해 달라고 신청한 착한 남편도 있다.

꼭 참가하게 해달라는 간절함이 절절하다. 가족애가 넘치고 넘친다.

출연신청한 제목을 몇 개 보니 다음과 같다.


출연신청, 정말 가고 싶어요.

산의 풀 한 포기에도 감사하는 울엄마에게 선물을.

집에만 계시는 우리 할머니 꼭 데려가 주세요!

도전 정신의 젊은 오빠(아버지를 신청함)

제 자신의 건재를 확인하고 싶어 신청합니다.

친정어머니 보내 드리고 싶습니다.

신청하기 위해 컴퓨터를 배웠습니다...


거제도는 30여 년 전 울산에 살 때 직장의 사우회원들과 1박 2일로 해금강을 가 본 게 전부다. 인터넷을 뒤져서 노자산과 가라산을 찾아보니 크게

힘들지 않은 코스여서 긴장을 하진 않기로 했다. 쿰부 히말라야의 칼라파타르를 오르고 랑탕의 체르코리를 오른 사람이 뭐 이런 산에 긴장을 하고

말고 하냐고 할 지 모르지만 28년간 377회나 오른 한라산도 난 갈 때마다 긴장을 하고 조심스러워 한다. 산이 얼마나 조심해야 하는 곳인지를

산행을 하면 할수록 그 위험성을 절감하게 되어서다.

그래도 겁을 내지도 말고 크게 긴장하지도 말고 모처럼 온 이런 기회를 마음껏 즐기자, 함께 하는 분들에게 내 사진집도 선물하고 함께 하는

동안 사진을 찍어 멋진 슬라이드쇼를 만들어 선물도 하자는 생각도 했다.

모이는 장소가 서울과 대전인데 청주로 가는 비행기편보다 저가 항공편이 많은 서울이 훨씬 싸기 때문에 서울로 정했다. 그리고는 즉시 항공권

예약도 했다. 모이는 전날 밤은 여의도에서 가까운 영등포에서 1박하기로 했다. 33년 전 여의도에서 근무할 때 자주 갔던 영등포의 맥주 천 원,

안주 천 원 하던 ‘균일집’은 지금도 있을까. 그리고 영등포에서 하룻밤 자려면 기왕이면 러브호텔이라는 데서 자보자고 ‘결심’했다. 서울에 사는

지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영등포에 있는 근사한 러브호텔에서 하룻밤 자고 싶은데 어디가 좋은지 좀 찾아봐 달랬더니 아이고 선생님이 왜 그런

데 가시려고 해요· 한다. 아니 러브호텔이 뭐 어때서, 러브호텔은 사랑이 넘치는 호텔이잖아, 기독교에서도 믿음과 소망과 사랑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강조하고 있잖아, 잔소리 말고 여의도에 가까운 러브호텔 하나 찾아서 알려줘.



2월 6일 목요일

신윤호 작가로부터 다시 전화가 왔다. 이번 동행할 사람들의 선정은 16개 市道에서 한 명씩 대표로 선정했다고 한다. 즉 경기도 강원도 충청남북도

전라남북도 경상남북도 제주도의 아홉 개 도, 그리고 서울시 인천시 세종시 대전시 광주시 대구시 부산시의 일곱 개 시를 합해 모두 16개 시도다.

인구 1,040만 명의 서울시와 60만 명의 제주도도 같은 한 명이니 나는 횡재를 했고 서울 사람들은 좀 서운하겠다.

전화로 간단한 사전 인터뷰가 있었고 각 지방의 향토음식을 한 가지씩 가져와서 나눠 먹기로 했으니 준비해 달라고 했다.

산행을 시작하게 된 동기와 시기, 산이 좋은 점 등등을 묻길래 체중 53kg 허리둘레 28인치의 약골이 산행을 하면서 정상체중인 65kg이 되었다는

말도 했다.


그런데 제주를 대표하는 향토음식이 뭘까 생각하다가 특히 맛이 좋다는 제주 소라를 가져가서 꽃소금에 알콜로 불을 만들어 구워먹으면 어떨까

하다가 다시 소라 말고 자리젓은 어떨까 하다가 어느 부인의 권고대로 마지막엔 오메기떡으로 결정했다. 그런데 말은 들었지만 난 아직 오메기떡이

어떻게 생겼는지 얼굴도 보지 못했다. 그래서 인터넷을 검색해 보니까 팥단지 비슷하게 생겼는데 보기에도 맛이 있게 생겼다. 아항 일케 생겼구나~


다시 한 가지 배낭이 문제였다. 히말라야 갈 때처럼 카고백을 하나 가지고 갈 수도 없을 것이고 그렇게 큰 게 필요하지도 않을텐데, 그렇다고

카메라 하나에 렌즈 하나를 가져가는데 촬영용 65리터짜리를 가져가기도 뭣하고 궁리 하다가 히말라야에 세 번이나 메고 갔던 35리터짜리

소형 배낭과 벨트팩만 가져가기로 결정했다. (결정은 그렇게 하고도 결국 45리터 하나를 구입했다. 오래 전부터 조금 더 큰 배낭이 필요했는데

그래서 어차피 사야할 거라면 지금 사자했다)


몇몇 친구들에게 ‘영상앨범 산’에 출연한다니까 ‘아이고, 다 늙어서 히말라야에 바람 나서 다니더니 이젠 별 짓을 다 한다~~’ 하면서도 잘

되었다며 축하해 주고 대단하다면서 즐거워한다.

늦은 저녁엔 이번 행사에 때 맞춰 어느 마음 착한 분이 98% wool 양말과 비상식으로 먹을 수 있는 누릉지를 한 박스나 보내왔다. 누릉지를

이렇게 비스켓 찍어내듯이 예쁘게 만들어 파는 걸 처음 봤다. 고맙습니다~, 복 많이 받으세요~!!


오늘 게시판에 공지된 최종적으로 선정된 사람들이다.

* 만 65세 이상 <즐거운 산행, 건강한 인생> 최종 선정 안내

강원 - 김부호

경기 - 박부훈

경남 - 이병함

경북 - 남성래

전남 - 유재원

전북 - 오삼락

제주 - 김봉선

충남 - 한순희

충북 - 허수호

서울 - 김기열

인천 - 유신숙

광주 - 정병모

대전 - 정종진

대구 - 전창욱

울산 - 박증도

부산 - 이동근


함께 하실 분들의 이름을 인터넷으로 검색해 봤더니 가까운 친구의 말대로 ‘뽑힐만한 사람들이 뽑혔다’고 할 만했다. 한 예로 오삼락 씨 같은 분은

히말라야 여러 군데를 비롯 지구촌 곳곳을 누비고 다니신 분이었고 그 외 다른 분들도 말 그대로 쟁쟁한 ‘산악인’이었다. 나 같은 사이비 산악인,

사진 찍으려고 산에 다니는 사람은 나 밖에 없는 것 같다.

이번엔 내가 사진을 찍는 게 아니라 찍혀야 하므로 카메라에 렌즈 하나로 준비를 마쳤다. 삼각대는 물론 기타 다른 촬영장비는 일체 휴대하지

않기로 했다. 그저 동행 중 1/16의 피사체일 뿐이고, 하나의 점일 뿐이고, 산길 걷는 행인1, 행인2로 만족하기로 했다. 내 사진 찍자고 많은 사람들이

함께 만드는 영상물에 방해가 되어선 안 될 것이다.


광명에 사는 작은 놈 준이에게도 연락을 했다. 여차여차한 일로 서울에 가는데 네 집이 멀어서 영등포에서 하룻밤 자고 가기로 했다고 했다.

러브호텔에서 잔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랬더니 아부지 그 시간이면 제 집에서 가도 시간이 얼마 안 걸려요, 그러니까 저의 집에서 주무세요.

제가 일찍 모셔다 드릴게요, 수현이 해원이도 보고 가시면 좋잖아요 한다. 자식이 이러는데 끝내 마다할 수가 없어서 그럼 그러자고 해버렸다.

처음으로 러브호텔에 가보려고 했는데 그것도 마음대로 안 된다. 뭐 어쩔 수가 없다.




2월 15일 토요일

이제 출발이다. 집을 떠나 여행길에 오를 땐 언제나 마음이 설렌다. 그러나 이번 여행은 교통편을 물론 숙식 걱정도 필요 없이 그냥 집을 떠나면

되는 여행이니 소풍 가는 것처럼 가벼운 마음이다. 산행이지 왜 여행이냐고 제발 시비 걸지 마시길. 내 기준으로는 집 떠나면 산에 가건 바다에

가건 다 여행이다.

17:50분 비행기를 타고 서울로 올라갔다. 배낭엔 옷 몇 가지, 비옷, 간식 조금, 수면유도제인 스틸녹스 몇 알, 소화제, 멀미약 등등을 넣었다.

히말라야 산 속으로 들어가는 것도 아니니 이 정도면 충분하다. 벨트팩엔 24-105mm 렌즈를 단 카메라 하나만 넣었다.


설 때 보고 불과 15일 만에 다시 보는데도 손주 수현이는 더 영리해졌고 태어난 지 이제 두 달 열흘 밖에 안 되는 해원이는 아주 더 예뻐졌다.

그냥 대강 보통으로 예뻐도 되는데 녀석은 어쩌자고 대책도 없이 이렇게 마구 예쁜지 모르겠다. 이래서 이군은 늙은 남편이 밥을 해 먹건 말건

방치상태로 두고 손주 사랑에 빠져 있나 보다. 여하튼 너무 예쁜 손주가 있는 사람은 사는 동네에서 들어오지 못하게 하거나 세금을 더 내거나

산에 오르지 못하게 한다거나 하는 법이 없으니 해원이가 아무리 예뻐도 난 걱정을 안 한다.




2월 16일 일요일-1일차

일찌감치 4시에 일어나니 이군이 언제 일어났는지 간단한 아침밥을 준비해 놨다. 한 술 뜨자마자 준이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여의도로 달렸다.

낮엔 그렇게 복잡하던 거리가 새벽시간엔 한산해서 준이가 운전하는 차는 쌩쌩 달린다. 짧은 시간이지만 부자지간에 이렇게 함께 차를 타고

가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게 참 기분 좋다. 요즘 회사 경영에 대한 전문적인 공부를 하는 네 모습이 참 보기 좋다고 했더니 작은 회사지만

주먹구구식으로 경영하는 것과 기준을 세우고 가장 효율적으로 운영하는 것엔 큰 차이가 있어서 열심히 공부한다고 한다. 자식이 이렇게 견실한

사회인이 되는구나 싶어 흐뭇하다.


40분쯤 걸릴 거라고 했는데 KBS 본관 앞에 도착하니 불과 25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그런데도 벌써 사람들이 도착해서 웅성거리고 있고 윤영진

 PD와 이지원 작가 그리고 동행할 ‘동기’들과도 인사를 나누었다.

05:30분이 집합시간인데 10분 후인 05:40분에 버스가 출발했다. 소위 코리안타임이란 말은 이제 역사 속으로 사라졌나 보다. 3일간의 일정이

들어있는 촬영안내문도 받고 스포츠웨어사에서 주는 등산복도 받았다. 입어보니 꼭 맞다. 어느 누구도 옷이 크네 작네 하는 말이 없다. 우리 나이엔

옷이 안 맞아도 이젠 몸을 옷에 맞춰 입을 지혜도 있을 나이다. 그렇게 오랜 세월 살아왔다.


07:40분 대전 KBS에 도착했다. 영호남 충청 등의 지방에서 참여하는 분들은 모두 대전에서 합류하는데 인사를 나누다보니 대전대표는 현직 때

나와 같은 회사에 다녔고 경북대표 는 내 홈페이지를 즐겨찾기에 해놓고 수시로 내 사진을 보는 팬이라고 하며 반가워한다. 이렇게 뜻밖의

장소에서 뜻밖의 사람을 만나니 남의 곗돈 떼먹고 내빼면 정말 안 된다.


모두 명찰을 받았다. 그런데 이 명찰이 얼마나 큰 지 그리고 거기에 쓴 예를 들면 ‘제주 김봉선 66세’라는 글자가 얼마나 큰 지 조금만 과장한다면

눈 나쁜 사람이 100미터 밖에서도 읽을 수 있을 정도여서 나이에 민감한 여자동기들은 비명을 지른다. 그래도 어쩌랴, 그래야 서로 간에 동지애가

돈독해지고 2박3일간의 촬영에 도움이 될 거라고 했으니.

다시 버스는 남쪽을 향해 달린다. 천안 가까운 대전이라고 호두과자가 나와서 ‘호도가 들어있는 호두과자’를 먹기도 하고 연양갱 소시지 귤 초콜릿

사탕 쌀과자 등등이 든 간식봉투를 받기도 했다. 이렇게 먹다가는 촬영 마칠 때쯤엔 뚱뚱이가 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이제 배가 부르다 싶었는데 이번엔 점심 도시락이 나왔다. 그런데 새우튀김을 비롯한 음식이 워낙 맛있어서 또 먹었다. 으음... 이러다가 배가

불러서 일어서지도 못하게 되는 거 아닐까.

12시에 통영휴게소를 지나고 거제도에 들어서서도 버스는 남쪽으로 계속 달린다. 햇살이 따뜻하게 내리는 해변을 보며 달리는 기분이 아늑하다.

이런 해변도로는 차로 달려도 자전거로 달려도 아니 그냥 다리가 아프도록 걸어도 좋겠다. 눈부신 햇살과 갯내음과 함께 하면서.


12:50분 명사해수욕장에 도착했다. 크지 않은 해변 백사장에 내려 한 사람씩 인터뷰를 했다. 네 대의 카메라로 각각 몇 명씩 따로 하기 때문에

시간이 많이 걸리지는 않았다. 그러는 동안에도 헬리캠은 공중에 떠서 소리를 내며 날아다니면서 지상의 우리들을 촬영을 했다. 이번 행사에

모두 다섯 대의 카메라가 투입되었다. 인터뷰에서는 자신의 소개, 이번 산행행사에 참여하게 된 동기 등등에 대해 질문과 답변이 이어졌다.


인터뷰가 끝나고 망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망산은 거제도의 남쪽 끝 부분에 있는 산이다. 정상이 해발 375미터밖에 안 되지만 정상에서 보는

풍광이 아주 좋다고 했다. 좋은 날씨여서 많은 분들이 산에 올랐다가 하산하는 중 우리들과 마주치기도 했다. 우리 가슴에 단 명찰을 보고

경기 서울 대구 강원 하다가 내 ‘제주’를 보고는 아이고 제주도에서도 왔네요, 반갑습니다~ 한다. 우리들은 그냥 지나가면서 제주도만 환영한다고

동기들이 투덜거린다. 하하하하~~  글케 억울하면 제주도에 사시라니깐요~~ ^^*

내가 제주도에서 와서 환영하는 게 아니라 내가 한 인물해서 그런다는 걸 왜들 모르는지 모르겠다. ㅊㅊㅊㅊ.....


우리가 산을 오르는 동안에도 등산로 주변 여기저기서 카메라가 바쁘게 돌아가고 공중에선 헬리캠이 왱왱거리며 돌아다닌다. 헬리캠은 여러

종류가 있겠지만 여기에 온 건 무게가 약 10kg이라고 한다.

지난 28년간 거의 혼자서 산행을 하던 내게 이건 ‘큰 사건’이다. 동기 16명 외에 좋은 영상을 만들기 위해 숨을 몰아쉬며 뛰어다니는 스태프들,

이런 대가족과 함께 산을 오른다는 건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거의 사진을 찍지 않았다. 내 독단적인 움직임이 혹여 촬영팀의 의도에 빗나가거나 멋진 화면에 티가 되어선 안 된다는 생각에서다. 난

등산객1이나 등산객2면 족하다.


망산 정상에 올랐다. 망산은 ‘망을 보는 산’이라는 뜻이라고 하는데 정말 정상에서는 앞에 더 거칠 게 없어 바다 멀리 멀리까지 다 보인다.

왜구가 몰래 들어오려고 해도 망산에서 다 들켜 버릴 것 같다. 그리고 풍광이 참 아름답다. 안개가 살짝 덮인 바다도 좋을 것이고 푸른 하늘에

코발트빛이 깊은 가을 바다도 아름다울 것 같다. 하늘 높은 가을에 다시 한 번 와 보고 싶다.

단체로 기념촬영을 하고 각각 인터뷰를 했는데 무슨 말을 했는지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 세상의 모든 여인을 사랑한다고 하지 않았을까 싶다.


차츰 짙어지는 황금빛 낙조가 아름답다. 하늘도 바다도 황금빛으로 물들었다. 여기서 좋은 사람과 어둠을 기다리고 달을 만나고 별을 만나면서

사진을 찍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산 후 유스호스텔의 식당에서 저녁을 먹었다. 특히 다슬기국이 맛있어서 두 그릇이나 먹었다. 다슬기국은 오래 전에 문경에서 목 선생님과

함께 한 추억만들기 때 처음 먹어봤는데 내 입맛에 잘 맞는다.

방이 배정되고 대강 씻은 후 밖으로 나가니 두 군데에 모닥불이 타오르고 큼직한 벤치엔 최원정 아나운서가 앉아 있다가 우리를 맞는다. 모두들

최 아나운서 좌우에 길게 앉아 편안한 대화를 하면서 서로를 알게 되는 친목의 시간을 가졌다. 어느 분이 팬플루트를 연주했고 망상에서 가곡을

부르던 분이 다시 한 곡을 노래하기도 했다. 내게도 질문이 와서 뭔가를 이야기 했는데 역시 무슨 말을 했는지 하나도 기억이 없다.


좀 더 흥겨운 분위기였으면 좋았을 것 같은데 너무나 진지하고 또 가슴 아픈 사연들도 있어 숙연해지기도 했다. 모두 비슷한 복장을 하고 전국

각지에서 이렇게 모였지만 몇몇 사람들은 피하지 못할 아픈 상처를 안고 하루하루를 살아가고도 있다. 그런 사연을 나타내지 않고 남들과 함께

웃으며 살아가려니 그 또한 쉽지 않을 것이다. 밤이 깊어 간다.

모임이 끝날 무렵 가지고 간 내 사진집 ‘아름다운 제주-한라산’을 동기들과 스태프들 모두에게 하나씩 나누어 주었다.




2월 17일 월요일-2일차

05시에 기상인데 4시도 되기 전에 부시럭거린다. 이래서 나이가 들면 새벽잠이 없다고 하나보다. 밤잠을 설칠 것 같아 자리에 들기 전 스틸녹스를

두 알 삼켰는데도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다. 그래도 아무렇지도 않다. 하루 이틀 잠 못 자는 것도 이젠 적응이 되어 다음 날 컨디션에 별 영향이 없다.

06시에 조반을 들고 06:30분 다포항으로 출발했다. 흐린 하늘에 바람 없이 조용한 새벽이다. 다포항 방파제에서 여명과 일출을 보려고 했으나

하늘엔 두터운 구름이 덮였다. 그래도 푸른빛 새벽이 좋아 몇 컷 사진을 담았다. 마음에 든다.

다포항을 떠나 가라산 등산로 입구에 도착했다. 오늘은 가라산 정상에 올라 능선을 타고 노자산 정상까지 산행한 후 하산하는 실질적인 산행을

하는 날이다. 산행거리는 약 10km. 한라산 성판악에서 동릉 정상까지의 9.6km보다 약간 더 먼 거리다.

간단한 체조로 몸을 풀고는 점심 때 먹을 김밥과 물 그리고 산행 중 먹을 간식과 비날씨에 대비한 비옷을 받은 후 산행을 시작했다.

처음부터 약간 급한 오르막이지만 숨이 찰 정도는 아니다. 모두들 원기왕성하게 잘도 걷는다. 하긴 이들이 누구인가, 16개 시도에서 산행에 선발된

사람들이 아닌가. 산행 경력이 짱짱한 사람들이다. 산행 중 누군가 뭔 산에 가 본적이 있느냐고 물었더니 이런 대답이 들렸다. 여기 온 사람에게

뭔 산에 가 본적이 있느냐고 묻는 건 실례가 아닌가요, 그 산에 가 본 중에 어는 계절에 갔던 게 가장 좋았느냐고 물어야 정상이지요. 이런 식이다.


천천히 걸었다. 가다가 간식을 먹으며 쉬기도 했다. 누군가 내게 ‘제주 김봉선’이어서 비바리 한 분이 오는 줄 알았는데 좀 실망했다고 했다.

그래서 나도 내 이름에 얽힌 ‘전설’을 이야기 했다. 전남 화순에서의 어느 모임에 갔는데 주최측에서 나를 어느 여자분과 한 객실에 배정했다고

했더니 득달같이 ‘그래서요?’하고 묻는다. 주최측의 방배정 의사를 존중해서 그 여자분과 같은 객실에서 잤다고 했더니 ‘정말이냐’고 또 묻는다.

하 참, 뭐가 그리 궁금들 한지 모르겠다. 남자와 여자가 한 객실에서 자는 게 그리 이상할까. 내가 정말 분명히 진짜 그렇다고 했더니 어느 분이

착오겠지만 주최측이 큰 실수를 했네요 한다. 그랬더니 또 다른 어느 분이 그건 착오가 아니라 제주에서 오신 김 선생에 대한 주최측의 배려가

아닐까요 하는 말에 여러 사람이 뒤로 넘어 갔다. 내 이름 때문에 여러 사람들이 웃고 즐거워 하니 내 이름이 좋은 이름임에 틀림없다.


11:25분 가라산 정상에 도착했다. 춥고 흐린 날씨에 바람이 강하다. 셔츠를 하나 더 껴입고 두터운 버프를 목에 둘렀다. 정상 표지석 가까운 데서

점심을 먹었다. 곧 비가 쏟아질 것 같이 하늘에 어두운 구름이 가득하다.

오후 들어 결국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배낭에 레인커버를 씌우고 노자산으로 출발했다. 가라산에서 보는 노자산 정상이 아득하게 멀어서

저기까지 언제 가냐 저기까지 가지 말고 조금 가다가 하산합시다 하기도 한다. 물론 농담이다. 급경사지도 오르내리고 너덜지대를 만나기도 하며

꽤 걸었는데도 하나 같이 지친 기색들이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예전에 악천후의 어느 어느 산을 산행했을 때의 무용담을 이야기 하며 이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투다.

능선을 타고 계속 걸어가는데 기온은 더 떨어지고 바람은 더 강하게 분다. 그런 상황에서도 산행하는 우리들을 좋은 앵글로 카메라에 담으려는

스태프들의 악전고투하는 모습이 눈물겹도록 가슴에 다가온다. 이렇게 애써 만든 영상물이 시청자의 눈에 어떻게 비칠까 궁금하기도 하다.

날씨 좋은 날 편안하게 산책하듯 다니며 사진을 찍는 사람들이 스태프들의 이런 모습을 본다면 어떤 느낌일까. 악천후의 한라산을 걸으며 사진을

담는 내 모습의 일부를 보는 것 같기도 해서 그들의 힘듦을 함께 하고 싶은 마음이다.

여리게 보이는 최원정 아나운서도 악착 같이 걷는다. 과연 한국 아줌마답다.

 

컴컴해진 오후 마침내 오늘의 최종 목적지인 노자산 정상에 도착했다. 빗방울과 차가운 바람이 몰아치는 가운데 네 대의 카메라로 나누어 각자의

인터뷰를 하는데 말소리와 바람소리가 섞여서 말도 크게 해야 했다. 지금 생각나는 사람이 누구냐고 하길래 아내라고 했다. 한라산에 가건 히말라야에

가건 이렇게 집을 나서면 아내는 늘 내 걱정을 한다고 했다. 더구나 이번엔 내 몸이 별로 좋지 않아서 더 걱정을 할 거라고도 했다. 고개를 돌려

카메라를 향해 큰 소리로 말했다. 여보, 나 이렇게 쌩쌩하니까 조금도 걱정하지 마~!(이럴 때는 원래 여보 사랑해~ 해야 하는데 까먹고 하지 않았다....

좀 걱정이다)

마지막으로 바람 속에 현수막을 펼치고 동기들 전체의 기념사진을 찍고 고생한 스태프들과도 한 컷 찍었다.

하산 길은 급경사의 계속이었다. 다행히 비가 많이 오지 않아 크게 위험하지는 않았다. 비가 많이 오거나 눈이라도 덮이면 이 길은 오르기도 내려내기도

힘들 것이다.


저녁 6시경에야 숙소인 거제자연휴양림에 도착했다. 젖은 옷을 숙소 여기저기에 걸어놓고 식당으로 가니 이미 식사 준비를 다 해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의 식단은 16개 시도에서 가져온 향토음식이다. 말하자면 전국의 향토음식이 한 자리에 다 모인 것이다. 김이 무럭무럭 나는 순대, 잘 삭힌

홍어, 상어고기, 과일 떡, 어리굴젓, 토하젓, 메밀전병 등등 나는 이름도 모르는 온갖 음식이 다 모여서 입맛을 돋우었다. 특히 생굴을 양념한 게

아닌 ‘진짜 어리굴젓’은 몇 십 년 만에 처음 먹어보는 거여서 그만 감동을 했다.

이런 자리에 술이 없으면 ‘안주가 욕한다’더니 어느 새 소주가 등장했다. 우리가 누구인가. 65년 이상 세상을 살았으면 못할 게 없다. 오리보고

계란을 낳으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안 되고 못하고가 없다. 나도 분위기를 타고 몇 잔을 마셨다. 캬~~~~!!!


이제 내일이면 졸업이다. 어제 입학했는데 내일이면 졸업이다. 이런 식으로 일주일 쯤 여기서 살았으면 참 좋겠다. 이군도 없는 집에 가서 또 혼자

밥 해 먹을 생각을 하니 더욱 그런 생각이다. 그래도 그럴 수는 없다. 시청료를 현실화 하지 않아 KBS도 힘들다는데 내가 자꾸 이러면 안 되는 거다.



 

2월 18일 화요일-3일차(마지막 날)

05:30분 기상해서 짐을 챙기고 06:30분 숙소를 떠나 저구항을 향했다. 오늘은 배를 타고 장사도에 갈 예정이다. 하늘은 여전히 어둡지만 다행히

비는 오지 않는다. 기상예보에선 오늘 하루 종일 비가 온다고 했는데 이럴 땐 좀 틀려도 좋겠다.

저구항 여객선 터미널 가까이 있는 식당에서 아침식사를 했다. 꽃게와 대하 등을 넣은 찌개가 맛있고 바닷바람 맞으면 컸다는 시금치맛도

상큼하다.

09시, 전세 낸 배인 ‘거제 매물도 관광유람선’에 타고 장사도를 향해 출항했다. 하늘은 흐리지만 바다는 큰 파도가 없이 조용하다.

20분 쯤 통통거리며 헤엄쳐 가니 바다 위에 오똑한 장사도가 나타났는데 난 장사도가 긴 백사장이 있는 야트막한 섬일 줄 알았다. 내 상상 밖의

장사도는 동백숲에 덮여 있고 이제 막 빨간 동백꽃이 피고 있다. 배에서 내려 잘 포장된 오르막길을 올라가보니 이 작은 섬이 화려하도록 개발되어

있다. 마침 SBS에서도 연속극 ‘별에서 온 그대’를 촬영 중이라고 해서 작은 섬에 두 개 방송국 촬영팀이 함께 한 셈이 되었다.


모두들 섬의 산책로를 따라 천천히 걸었다. 동백숲 사이로 난 산책로가 참 아름답다. 매일 아침 이런 길을 걸으면 얼마나 좋을까. 온실도 있고

지금은 운영하지 않지만 ‘죽도국민학교 장사도분교’의 단칸 건물도 그대로 잘 보존되고 있는데 학교의 운동장엔 예쁜 분재가 가득하다.

산책로를 걷다가 초가의 툇마루에 앉아 잠시 쉬는 동안 윤 PD의 청으로 배낭에서 하모니카를 꺼내 연주했다. 처음 곡으로 대니보이를 그리고

두 번 째엔 홍도야 우지마라를 전주부터 불었는데 앵콜이 쏟아져 다시 ‘봉숭아’를 불었다.

‘봉숭아’를 연주하거나 들으면 늘 목 선생님이 생각난다. 이제 선생님 가신 지 만 10년, 금년 기일 무렵엔 청주 목련공원으로 찾아뵈어야겠다.

  

마지막 인터뷰를 했다. 이번에도 네 대의 카메라 앞에 너덧 명 씩 가서 한 사람씩 했다. 역시 이번에도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나지 않는데 나이를

무시하고 살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너무 나이를 의식하지도 말고 나이 때문에 주눅 들지도 말라고 했던 것 같다. 처음과 달리 이젠 카메라 앞에서도

더듬거리긴 해도 말도 제법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제 졸업이다.


점심식사 때는 막걸리가 나왔다. 한 모금 마셔보니 맛이 있어서 두 잔을 더 마셨다. 그런데 경북대표가 오더니 하모니카 연주 잘 들었다면서 한 잔을

또 권해 모두 석 잔이나 마셨다. 홍도 덕분에 술도 얻어 마시고, 홍도야 고맙다.

역시 술은 좋은 것이다. 좀 으스스하던 몸이 따뜻해지고 어느 분은 눈알 굴러가는 게 아주 부드럽다고도 했다. 이제 이번 일정의 식사도 모두 끝났다.

아침에 장사도로 들어왔던 선착장에 가서 다시 배를 타고 12:45분 저구항으로 떠났다. 그리고 서울에서 타고 온 버스를 타고는 13:13분엔

시외버스터미널이 있는 고현으로 출발했다. 준이에게 연락했더니 김해에서 17:05분에 출발하는 제주행 비행기의 항공권을 예약했다고 한다.

저구항에서 고현까지는 약 50분이 걸렸다. 고현에서 몇몇 동기들과 함께 내렸고 계속 버스를 타고 올라갈 동기들과 헤어졌다. 14:30분에 출발하는

고현-김해공항행 버스를 탔다. 고현에서 김해공항까지는 약 1시간 10분, 이제 모든 일정이 끝났다.


2박3일간 함께 하신 동기님들 모두 모두 건강하고 멋진 삶을 사시기 바란다.

이 행복한 추억 오래 오래 간직할 것이다.




** 이번에 촬영한 '영상앨범 산'은 2부작으로 편집되어 3월 2일과 9일에 방영된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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