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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도토리묵에 대한 단상

조회 수 17212 추천 수 0 2010.04.11 16:14:04

난 묵 중에서 특히 도토리묵을 좋아한다.

막걸리 한 잔과 맛있는 양념간장에 찍어먹는 도토리묵은 나를 행복하게 하기도 한다.

그러나 '진짜 도토리묵'을 사먹기가 쉽지 않아 현직 때 설악산에 갈 때는 꼭 소공원 내의 식당에 가서

도토리묵을 사먹곤 했다. 거긴 틀림없는 '진짜 도토리묵'을 팔았다.

난 도토리묵을 맛보지 않고 눈으로 보기만 해도 '진짜'를 안다.

젓가락으로 한 점을 집어 들어보면 더 확실하게 알 수가 있다.

도토리묵은 쇠젓가락으로는 집기가 쉽지 않다.

살짝 집으면 미끄러지고 꼭 집으면 잘라진다.

한중일 3국 중에서 쇠젓가락으로 콩을 집는 사람은  한국인이 유일하다며 감탄하기도 하고, 그건 아무 것도

아니고 차곡차곡 양념한 깻잎을 젓가락으로 한 장씩 벗겨 먹는 걸 보면 예술이라고도 하지만  얇고 길게 썬

도토리묵을 쇠젓가락으로 끊어지지도 않게 집어내는 걸 봤으면 아마 뒤로 넘어갈 것이라고 확신한다.

 

여하튼 도토리묵이 먹고 싶어 지난 해 여름엔 삼척에 가서도 어느 산골유원지에서 그걸 주문해 먹었는데

전혀 제 맛이 아니었다.

사람의 입맛이라는 게 얼마나 예민하고 간사한가.

도토리가루에 다른 게 좀 섞였기로서니 맛이 얼마나 다를까.

천만의 말씀이다.

입에 닿는 도토리묵의 탄력과 혀끝이 느끼는 그 '심오한' 맛과 향취는 세월이 가고 나이가 들어도, 객지생활

아무리 많이 해도 변할 수가 없다.

 

자, 그러면 어쩔 것인가.

도토리묵이 아무리 먹고 싶다한들 제주에서 설악산까지 갈 수는 없는 게 아닌가.

그거 안 먹으면 죽을 병이라도 걸렸다면 모를까 말이다.

 

그러나 두드리면 열리고 간절히 원하면 이루어진다고 했던가.

지난 해 가을 아내와 어느 계곡에 사진을 촬영하러 갔다가 마치 도토리를 쏟아부어 놓은 듯 널려있는 곳을 발견했다.

보통 도토리묵은 도토리가 아닌 상수리로 만든 걸 말하는데 이건 도토리도 아니고 상수리도 아닌 중간쯤 되는

모양과 크기였다. 눈을 두리번거리며 도토리를 찾는 게 아니라 아예 주저앉아서 그냥 쓸어담는 식으로 도토리를

촬영배낭의 아래 수납함에 가득 채워서 돌아왔다.  묵을 만들어보자는 거였다.

 

인터넷에서 '도토리묵 만드는 법'을 검색했더니 여러 수십 가지도 넘게 자료가 쏟아져 나온다.

그중에서 '한다더라~' 하는 건 빼고 제법 신빙성이 있는 내용을 골라 본격적으로 도토리묵을 만드는 '공정'에 들어갔다.

우선 거기서 시키는대로 3일간 물에 담궈 놓은 후(왜 담그는지는 지금도 모르겠다)  야외용 은박지자리에 널어 말렸다.

싱싱한 도토리는 껍질을 벗기면 밤 껍질 벗긴 것과 같다.

갈색 속껍질이 나오고 그걸 벗기면 하얀 속살이 나온다.

그런데 그렇게 깐 도토리를 다음 날 아침에 보니 거의 검다할 정도로 짙은 갈색으로 변해서 깜짝 놀랐다.

 

다 이야기하자면 너무 길어 대강만 하기로 한다.

그렇게 깐 걸 말리고(말리면 떫은 맛이 많이 사라진다고 해서)  다시 물에 담가 며칠 불린 뒤 믹서로 곱게 간 후 며칠간 

물을 바꾸어주며 떫은 맛을 없애면 도토리묵이 거의 만들어진 것과 다름없다.

이제부터 기술과 노하우가 필요하다.

우리도 몇 번 실패했는데 이 요상하게 생긴 도토리는 묵이 안 되는 게 아닐까 하는 의심까지 했었다.

 

며칠 물에 가라앉힌 도토리가루를 라면 끓여먹는 노랑냄비에 넣고 물을 생각보다 많이 넣고는 가스불에 올리고 잘 저어준다.

가루의 양과 물의 양은 거의 1:3~4 정도 되는 것 같다. 그래서 가루가 적어도 많은 묵이 만들어졌다.

어느 정도 젓다보면 난데없이 점도가 커지며 액체가 반고체 상태로 변한다. 깜짝 놀랐다.

어느 정도(이 어느 정도라는 게 좀 애매한데 나도 뭐라고 표현할 길이 없다) 점도가 커지면 불을 아주 약하게 하고는 냄비 뚜껑을

덮고 뜸을 들인다. 뜸을 들이기 전에 '진짜 참기름'을 약간 넣으면 더 좋다.

10분 쯤 지난 후 그대로 식히든지 보기좋은 그릇에 담아 두면 점차 탄력이 커지면서 식는다.

이게 바로 '진짜 도토리묵'이다.

 

10여 년만에 '진짜 도토리묵'을 먹고 하도 감동해서 그 느낌을 쓴다는 게 아예 묵 만드는 공정을 쓰게 되었다.

우짜든동 이제 매년, 아니 먹고 싶으면 언제든지 도토리묵을 먹게 되었으니 너무나 행복하다.

그래, 안 되는 건 되게 하라고도 하는데, 먹고 싶은 거 없으면 만들어 먹으면 될 게 아닌가.

 

오늘 낮에 먹은 내 점심상을 사진 찍었다.

상추는 우리 베란다에서 '재배'한 것이니 당연히 100% 무농약 채소다.

 

 

 

20100411-1.jpg



profile

바람소리

April 11, 2010
*.110.183.124

우와~ 맛있겠다,

제주 막걸리도 정말 맛있던데요 ^ ^

상추,풋고추가 듬성듬성 보이는  양념간장 다 환상적이군요, ㅎㅎ 음식 잘하신다고 소문 내실만 합니다 ^ ^

profile

향/홈지기

April 11, 2010
*.183.197.32

사랑방에 좋은 사진 올리시면 도토리묵은 공짜입니다.

정말 제주막걸리맛은 일품이지요~ ^^*

profile

가제트

April 23, 2010
*.69.230.132

사진을 보니 정말 막걸리가 절로 생각납니다..

대부분의 남자들은 산행을하다가 아님 뒷동산 도토리를 베낭에 잔뜩 담아와서는 여보야한테 도토리묵 만들어달라고 하고는 베낭채 주고 만답니다.

정작 만들어 주지는 않고 재료만 준다는거죠.. 근데 그것 만드는것이 얼마나 잔손이 가고 힘든지 대부분의 남자들은 모른다는 거죠..

근데, 선생님이 직접 만드셨다니 대단하십니다. 이제 속지않는 오리지널 도토리묵을 드실수가 있게 되었으니 추카추카 드립니다 ^^

혹, 다음에 제주갈일 있게되면 오리지널 맛 보여주세용 ^^

profile

향/홈지기

April 23, 2010
*.183.197.32

옳으신 말씀입니다.

저도 도토리묵을 만드는 게 이렇게 복잡한 줄 몰랐습니다.

이젠 말린 도토리가 많이 있으니 제주 오시면 언제든지 우리 집에 들르십시오.

제주 막걸리와 제주 도토리묵으로 한 잔 하십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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